모르는 사람 by 현경

모르는 사람

강화길괜찮은 사람문학동네, 2016 -

 

문학평론가 황현경

 


처음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바꿔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호수, 26



보면 강화길의 인물들은 한 번씩 꼭 이런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여덟번째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지하 매점 테이블에서 환자의 지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녀의 대화를 들었다.

목전에 죽음을 두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는데나는 그 심정을 전혀 모르겠다나는 그 두 사람이 죽음 앞에서 가능한 한 많이 고통스럽기를 빈다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이 가장 끔찍한 일이라는그러니 가능성이 없다면 알아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그들 스스로도 반드시 지키기를 빈다소원대로 우아한 죽음을 겪어보시지.(당신을 닮은 노래, 144)

 

쇠락해가는 조그만 촌도시 안진스물아홉 딸 수진은 이 년 전 난소암 4기 진단을 받아 자궁과 여러 장기를 들어냈고아빠는 십팔 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중년의 엄마는 시의 합창단에서 소프라노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목소리를 잃었다스러져가는 것들의 이미지가 차곡차곡 겹쳐진 이 소설은 아픈 딸과 그녀를 보듬는 엄마의 애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삶의 결정적 순간마다 좌절해온 모녀의 대물림되는 기막힌 운명과그것을 공유한 이들만의 끈끈한 유대에 관한 이야기도 될 수 있었다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망과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도 될 수 있었다.저런 대목들이 없었더라면생의 끝으로 등 떠밀리는 이의 마음이란 으레 저런 것이라 할 참인가.그렇다면 이제는 취미일 뿐인 가곡 강습 발표회의 독창에 기를 쓰며 매달리는 엄마는 또 어떤가.불쑥 터져나오는 신경질과 생떼가 아무래도 좀 너무하다 싶다는 말이다그러니까 알겠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이 소설들은 병든 마음에 대한 치밀한 사례연구다모든 병은 원인이 있고어떤 병은 원인을 제거하면 낫는다그들은 왜 넘치는가누구에게나 억압된 무언가는 있고 또 누구나 그것을 한 번씩 표출할 때도 있는 법이니 이 질문만으론 안 된다그런 사람이 있는 것과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다르고강화길의 소설에는 그런 사람만 있다왜 하필 그런 인물인가하필 그런 인물로 무얼 말하려는가 혹은 물으려는가여기까지 들어가야 한다그러자면 우선 유사한 사례를 더 모아볼 필요가 있다물론 얼마든지 더 있다.

 

*

 

그 과잉의 정도가 극심하다못해 기괴하게까지 보이는 인물로는 벌레들의 셋이 단연 으뜸이다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온 예연의 수상한 고택에 희진과 ’ 수지가 룸메이트로 들어온다삶이 꼬이고 꼬인 끝에 제 존재에 대한 환멸에 짓눌려 있던 둘에게 최후의 안식처가 제공되었으니 여기까진 좋다더구나 은 참 안정적인 구도 아닌가그 무게중심이 아주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전까지는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문제는 과잉이다일단 넘쳐흐르기 시작한 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들이 보이는 신경증의 증상들은 실로 다채롭다함께 먹은 갈비찜의 뼈를 깨끗이 닦아 진열하고 컵을 색깔별로 정리하고 생선 머리를 일렬로 늘어놓고 온갖 잡동사니를 서랍에 모으거나 거실 구석과 방에 층층이 쌓아두는 예연열지 말라던 서랍을 열고 들어가지 말라던 방에 들어가려는 희진예연과 희진이 자신에게만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는 수지무엇보다도 이들은 그녀 자신이 희진과 나 각자에게 더 친한 사람이 되기를”(120원하는 예연의 병증을 공유한다관계의 주도권을 쥔 것은 예연이므로 와 희진은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고예연이 희진을 고르며 증폭된 의 불안이 관계의 파탄을 낳는다.

떠나고 말고는 문제도 아니다선택받지 못하는 것 자체관계에서 소외되는 것 자체가 문제다.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일찍 부모를 잃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지는 말되예연은 차치하고서라도수지에게는 다단계에 빠졌을 당시 물건을 거의 팔지 못해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가”(114자문하며 자살을 시도했던 기억이희진에게는 동거하던 남자에게 모든 걸 빼앗긴 자신을 혐오했던 기억이 있다스스로를 따돌려본 이라면 소외의 끔찍함을 누구보다 잘 알 터,그럴 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도 남는다급기야 희진을 살해한 게 환상인지 아닌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된 를 보라.

트라우마눈사람」 역시 그러한 이야기다소설의 뼈대는 어른이 된 ’ 기채가 사회복지사와의 십 년이 넘는 상담을 통해 떠올린 어린 시절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다이혼 후 차례로 떠나간 아빠와 엄마에 이어 형에게 버림받은 것이 그 기억의 큰 줄거리다형이 사기를 당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둘만의 조용하고 다정했던 일상은형의 여자친구 민아가 등장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닫는다. ‘은 늘 이런 식인 건가. “형은 오히려 내가 누나를 괴롭혔다고 말했다두 사람이 너무 가까워지면 형이 나를 떠날까봐 누나를 괴롭혔다고.”(207) ‘가 누나라 부르던 민아가 먼저 떠났고민아가 떠날까봐 두려워하던 형이 떠났고, ‘만 남았다.

는 쓸모없어지는 걸 두려워했다쓸모가 없는 건 버려지니까그런 였다면 폐지 할머니를 뒤쫓으며 고물을 주웠던 것이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다마치 벌레들의 예연처럼버려질까 두려운 마음을 쓸모없는 것들을 모으는 일로 해소해보려던 것그 과정을 내내 함께한 이가 은영이다흐릿한 기억이라는 설정에 기대어 의 유년이 통째로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호하게 그려졌다고는 해도유독 기미도 없이 나타났다 자취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은영이 가 만들어낸 상상 속 여자친구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새로운 무언가를 꿈꾸게 하던 민아가 형에게 필요했듯, ‘에게도 불안한 유년을 견디게 해줄 히로인 은영이 필요했던 것이다.

꿈의 상징물이던 세계지도를 떼어낸 후에야 홀로 떠날 수 있었던 형과 마찬가지로 ’ 또한 형,은영, ‘눈사람’(그도 반쯤은 환영이다), 폐지 할머니 등의 조력자들과 차례로 작별한 후에야 홀로 남게 된다떠났느냐 남았느냐가 아니라 둘 다 혼자가 되었다는 게 핵심이다그렇게 서로 떨어져도 형도 자신만의 힘으로 버티다 결국에는 살아남았으므로 이를 일종의 성장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뭔가를 채워가는 게 아니라 비워가다 마침내 텅 비어버리는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요컨대 벌레들은 너무 잃어 너무 붙잡게 된 이들의 이야기이고눈사람은 너무 잃어 너무 놓게 된 이들의 이야기이다그 두 이야기가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에서 맞물린다신분이 달라 금지된 관계였던 굴 말리크와 타니 칸의 이야기는 사랑이 불안으로 불안이 집착으로 변하다 끝을 맞는 것을 보여주고이별한 연인 와 그녀가 굴 말리크의 유품을 찾으려 헤매는 이야기는 서로를 향한 모든 마음이 사라진 그들의 지친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길로 접어든 연인들둘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남자가 손가락으로 입구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말고 저쪽으로 나가.”

(……직원은 두 사람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그러더니 입구 문을 닫아버렸다문 안쪽에도 자물쇠가 있었다철컥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보관소 안을 울렸다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로 들어왔으면 저기로 나가는 거야싫으면 여기 계속 있는 거고.”(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233)

 

사건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예시로도 읽히는 이 장면의 진실은 이렇다삶의 어느 순간을 한번 통과하면 다시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지나온 한 시절의 문에 철컥 하고 자물쇠가 걸리고 나면 들어온 문과는 다른 문으로 나가 또다시 모르는 길을 헤매야 한다는 것. “못 돌아가면 어때죽기야 하겠어?”(226아니못 돌아간다는 것을 못 받아들이면 죽기도 한다아니,이것도 아니다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되어버릴 수밖에 없으니미리부터 과거는 떠나보내라고 기억은 잊어버리라고 사랑은 놓아버리라고 존재하는 것이겠다생은 그러고서야 가능하다.

긴 여정 끝에 살짝만 건드려도 바스라질 듯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사람의 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지비로소 삶이 다 메말라버린 그들 앞에는 끝도 보이지 않는 생만이 남았다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이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등 떠밀려 앞으로만 가는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얻을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원하고 놓칠 걸 알면서도 움키는 동안만곧 집착으로 넘실대는 동안만 생생하다집착만이 삶의 증거인 이상 삶은 그 자체로 병인 것생이 아닌 삶을 갈구하는 한 우리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도 들지 않는가금지된 연인들의 숨통을 죄어오던 그들이 없었더라면 하는어디선가 나타나 득시글거리던 벌레’ 같은 그들이 없었다면그 정체만이라도 시원스레 알 수 있었다면 삶이 조금이나마 잔잔했을까그 정체를 모르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인지라 대답은 쉽지 않다그러고 보면 강화길 소설의 인물과 사건 뒤편에는 언제나 이렇듯 모르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서성거린다미장센(Mise-en-Scene)이나 맥거핀(MacGuffin) 따위로 보아 심상히 넘기기엔 너무도 집요하게 등장하기에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무언가를 은폐하며 그린 것인가은폐된 무언가를 그린 것인가한편으로는 환상성이 제거되어 또렷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더 깊숙이 감춰진 무언가로 인해 더 모호한세 편의 사람’ 연작을 마저 뒤져볼 차례다.

 

*

 

니꼴라 유치원 귀한 사람의 배경은 안진. 1947년 천주교 신부와 교인들이 니꼴라 성당 구석에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출세의 첫 단추처럼 되어버린 그곳에 아들 민우를 입학시키려는 가 주인공이다삼 년째 선착순 정원 안에 들지 못해 낙담한 에게 자리가 났다는 전화가 걸려온다다음날로 민우를 데리고 가 입학 서류에 서명하는 것까지가 전부인데도 굉장히 긴 이야기를 힘겹게 읽은 것만 같다이야기 주위로 여러 사연들이 덧붙여져 있어서만은 아니다민우를 향한 기대에 제 어린 시절 상흔을 겹쳐 보던 가 서서히 집착에 삼켜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괴로워서만도 아니다그러고도 남은 무언가그것 때문이다.

어째서 후보 2번인 민우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인가어제저녁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여자는 누구이며원장과의 상담중에 불쑥 나타난 괴이한 여자는 누구인가좀처럼 욕심이 없어 염려스럽던 민우가 제멋대로 한입 가득 욱여넣은 원장의 쿠키에는 정말로 뭔가가 들어 있는가무엇보다도 수많은 괴소문의 내용은 뭐고 진실은 뭔가. ‘모르겠다가 답이다니꼴라 유치원 출신이라는 것은 곧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는 의미라 했던가그렇다면 이제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될 이는 민우인가 인가역시 답은 모르겠다이다답이 같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도대체 귀한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놓치고 있다는 직감불안은 그로부터 시작된다놓치고 있는 그걸 잡거나 최소한 그게 무엇인지만이라도 알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강화길의 인물들에게 그런 일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끝까지 이들은 모르는 사람일 뿐해소되지 못한 불안이 차곡차곡 쌓이다 넘친다. ‘귀한 사람이라니뭔지도 모르는 그것이라면 도 민우도 될 수 없을 터이들에게 그것은 언제나 미래에만 가능한 무언가다그래서 끝도 없이 길게 느껴진다또한 힘겹다. ‘처럼 우리도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 있었던 셈이기에 가 불안한 그만큼 우리도 불안하다.

불안의 추체험이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경험은 괜찮은 사람을 읽으면서도 거듭된다이번에도 이야기는 복잡할 게 없어 화자인 민주가 돌아오는 봄 결혼할 의 차를 타고 그가 마련해놓았다던 집으로 향하는 짧은 여정이 전부다앞선 작품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 드라이브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고 실로 그렇다조수석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손바닥만한 상자들이나 그의 집 안에서 깜빡이던 붉은 불빛의 정체 등을 더는 일일이 묻지 말기로 하자답이 없을 게 뻔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다보면 마지막까지 남는 질문, ‘그는 괜찮은 사람인가로도 충분하다아니라고 확답할 참이라면 미안하지만 그건 작품을 잘못 읽은 탓이다혹여 그렇게 읽힐까봐 이 소설은 시작하자마자 독법부터 제시해놓았다.

 

지난 일요일그가 나를 밀쳤다. (……현관문 밖으로 나왔을 때계단과 복도를 비추고 있던 불빛이 지직소리를 내더니 갑작스레 꺼졌다눈앞이 캄캄하게 사라졌다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나는 그를 불렀다그를 찾았다바로 그 순간이었다강한 힘이 내 등을 퍽하고 밀었다나는 계단 아래로 굴렀다.(괜찮은 사람, 81)


그건 정말로 실수였다정전이었다그 역시 당황했고나를 찾는다며 아무렇게나 팔을 뻗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많이 주고 있었다하필이면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가 있었다그는 내가 그 앞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나는 괜찮다고 했다그 역시 어둠 속에 있었으니까.(같은 글, 84)

 

그가 나를 밀쳤다나 강한 힘이 내 등을 퍽하고 밀었다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많이 주고 있었다나 하필이면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가 있었다의 미묘한 차이우리가 먼저 접하게 되는 진술은 위의 것인바 거기에는 그의 실수였다는 진실이 빠져 있다그 결과 둘이 함께 겪은사고는 가 일방적으로 당한’ 사고처럼 읽힌다사건은 하나일 뿐인데 진술이 둘인 이유는 명백하다소설을 읽는다는 건 결국 화자의 말을 듣고 믿는 일그렇듯 무심결에 의지해온 화자가 정말로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이인지를 이번만은 곱씹어보라는 것다시 말해 이것은 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며앞으로의 진술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안내하는 대목들이다.

시키는 대로 읽고 나면불길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고는 하나 그저 운수 나쁜 날이었던 것으로도 보인다지난 일요일에 다친 엉덩이는 욱신거리고차 안의 퀴퀴한 냄새와 열기로 온몸이 달아오른데다가잘못 든 길에서 만난 손톱이 새카만 사내와 그 손에 들려 녹아 흐르던 분홍색 아이스크림까지그러니 만 잠시 예민했을 뿐변함없이 그는 괜찮은 사람이어서 돌아오는 봄,우리는 결혼할 것이다”(82, 106). 그런데 잠깐, ‘를 못 믿겠다 치면 실수였다던 그의 말도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뭔가를 숨긴 채 줄곧 강압적이던 그와의 동행이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그렇다면 그는 역시 괜찮은 사람이 아닌 걸까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여전히 그는 어둠 속에 있다.

이율배반처럼 느껴지는 저 명제는 어딘가 예민해 보이는 여성 화자와 무언가 감추는 듯한 남자의 동행이라는 점에서 닮은 데가 많은 호수 다른 사람에서도 똑같이 추출된다아니이 작품은 우리에게서 기어이 확답을 끌어내고야 말기에 한층 지독하다고 해야겠다배경은 또다시 안진.이십 년 지기 친구 민영이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있던 호숫가로 ’ 진영이 향한다거기 민영이 두고 온 뭔가를 찾아냈다던민영의 남자친구 이한과 함께사고를 당하기 전 민영은 가느다란 팔뚝에 찍힌 동그란 멍자국을 카디건으로 가린 채 에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무섭다고 고백했다무엇이었을까 혹은 누구였을까답은 없다.

사귀던 남자에게 목을 졸렸던 의 과거목에 남은 멍자국을 본 민영에게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겠다며 둘러대었던 기억사과하고 싶다는 말에 호숫가에서 다시 만난 전 남자친구로부터 가 느낀 생생한 공포 등을 통해 소설은 이름마저 닮은 진영과 민영을 끊임없이 겹쳐놓는다마치 이래도 를 의심할 거냐고 물으려는 듯이이렇듯 호수의 세련된 기술(記述/技術)은 끝내 우리로 하여금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믿게 하는 까닭에이한이 가 전에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닌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니다.

그러나 민영에게 폭력을 가한 누군가와 이한이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여전하다이한의 알리바이그리고 무죄추정의 원칙우리는 이것이 친구가 발견된 호수를 어둑어둑한 저녁 거구의 남자와 찾아가느라 잔뜩 예민해진 화자의 진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남편에게 머리카락을 쥐어뜯긴 미자네버스에서 욕하던 남자늦은 밤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와 전화번호를 받아간 남자 등은 사건과 아예 관련이 없고하물며 이한이 의 팔뚝을 거세게 잡아당겼다는 것도 그가 범인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무엇보다도 우리는 물속에 잠겨 있던 딱딱하고 단단한길고 얇은 물건”(39)이 무엇인지도, “해야 할 일을 했다”(41)던 가 뭘 한 건지도 결국 모른다어느 하나도 답이 될 수 없다면 어느 하나도 답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그는 다른 사람이다.

아직 남았고여기서부터가 진짜다. ‘그가 범인이라면 나는 불안하다는 참이지만그렇다고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나는 불안하다가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아니그가 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조건과 내가 불안하다는 결론은 애초부터 무관하다곧 진실의 자리에 놓인 것이 건 ×건 아니면 아무것도 없건 내가 그것을 모르면 나는 불안하다여태 벌레가 궁금한가정체는 숨겨져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재하는 무언가다하여 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운용은 속 모를 인물들을 통해 마침내 진실을 사라지게 하는 기예를 선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 반대알 수 없는 진실이 있을 때 인간은 병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제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은 병증이며,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장치가 아니라 결론이다.

두 가지 해석을 함께 제출한다하나는 이렇다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을 제외하면 강화길의 소설은 모두 일인칭이고눈사람까지 제외하면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번잡스레 하나하나 예시를 들 것도 없이 그녀들은 모두 남성 인물에 의해 위협을 느꼈거나 느끼는 중이고그런 그녀들의 증언은 이렇게나 위태롭다말하자면 그들의 세계는 그녀들’ 앞에서 더욱 불투명하며그녀들에게는 언제 어디서 눈앞에 (대개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형태로돌출할지 모를 그 정체불명의 세계가 더욱 불안하다이 특수성에 주목한다면 강화길 소설의 페미니티는 이제껏 읽어온 것보다 훨씬 더 읽어야 하는 것일 테고그러자면 그에 상응하는 페미니티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그래서 이 해석은 여기까지다.

남은 하나는 이렇다.

 

*

 

강화길의 등단작 이 발표되던 2012년 무렵 우리는 파국을 상상하는 데 골몰해 있었다.무너져내린 세계를 떠도는 살아 있는 시체들에 대한 진단 혹은 예언가령 의문의 폭발로 인한 낙진과 어둠과 열기로 뒤덮인 도시전염병으로 기형이 되어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구덩이 속으로 치워지는 사람들그려낸 세계가 이러한바 이 비슷한 시기 함께 파국을 상상하던 소설들 중 하나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크게 같고 작게 다르며아직(무너지지 않은 세계를 사는 우리는 이제 그 작은 차이에 더 신경이 쓰인다.

일단 이런 이야기다화자인 재인과 그녀의 연인 수연이 폭발한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 “좋은 곳에서 시작하고 싶어”(173)함께 살 방 하나를 구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끝내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은 재인뿐홀로 남은 재인은 석회로 희부예진 수돗물을 마신 탓에 돌처럼 굳어버린 수연 곁에 머물길 택한다아마 그녀도 서서히 병들어 소멸하리라여기까지만 읽으면 이는 고작 방 하나가 고작 방 하나가 아닌순간순간 경제적 소외를 온몸으로 감각해야 하는 어떤 세대의 이야기가 된다아주 작은 관계에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찢어놓고야 마는 자본의 힘.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폭발한 것은 도시만이고도시 밖의 세계는 그대로다하물며 도시그 또한 와르르 무너진 건 아닌지라 기약 없는 재건이 진행중이다다시 말해 의 세계에는 무너진 것과 망가진 것과 멀쩡한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다세계는 없어진 게 아니라 너무 많아졌고다행인지 불행인지 미래는 너무 남았으며이들은 죽은 것과 다름없기는커녕 살아도 너무 살아 있다세계가 폭삭 주저앉은 후라면 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만군데군데 망가졌을지언정 아직 많이 남았다면 삶은 여전히 가능하다이 작은 차이로부터 강화길 소설이 출발했다.

삶은 가능하다단 망가진 도시 안에서만. “수연은 도시에서의 삶이 우리가 시작한 새로운 삶의 출발이라고 여기고 있었다.”(178도시의 어두운 방에서 잠시나마 이들은 서로를 어루만지며 기뻐하지 않았던가요컨대 도시 밖에서는 함께 몸 누일 방 하나 허락되지 않는 비루한 생만이 가능하고도시 안에서는 삶은 가능하되 생이 불가능하다한데 이들은 처음 점찍어둔 방을 구할 만큼의 돈을 모았을 때까지만 해도 돌아갈 수 있었다이미 시작했는데 더 시작하려 하고 이미 함께였는데 더 함께하려 하지만 않았다면하여 다시금 집착은 곧 삶이며다시금 삶은 곧 병이다그리고 그것이 발병하는 그때뒤편에는 그들처럼 혹은 벌레들처럼 정체불명인 세계가 있다.

병든 세계와 병든 인간세계가 먼저라는 백 년도 넘은 믿음에 따르면세계를 치료하면 인간도 낫는다그러나 어디가 어떻게 병들었는지를 알 수 없는 세계라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하나아니그에 앞서 세계가 먼저라고 아직도 말할 수 있을까벌레가 나오면 불안한가 불안하면 벌레가 나오는가우리가 모르는 세계와 세계를 모르는 우리 중 어느 게 원인이고 어느 게 결과인가어느 것이 먼저라 할 것도 없이또한 어느 것이 어느 것 때문이라 할 것도 없이따로 또 같이 병드는 게 지금의 세계와 지금의 우리다여기 소설들에 그려진 파국의 풍경이 이러하거늘내가 보기에도 우리는 아마 이렇게 끝날 것 같다참담하다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고남은 시간은 너무 길다.

태평성대에 사람들은 목가를 부른다어디서부터 얼마나 망가졌는지도 모르게 천천히 스러져가는 세계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웅크린 채 끝을 노래하는 사람들편안한 소진[安盡]의 노래절망이 희망보다 안락하고 희망이 절망보다 불안하다면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닐까바로 그 안락을 뒤흔드는 힘이 강화길 소설에는 있다그것을 읽으며 우리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들의 불안이 전염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왜 너는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으냐는 질문이 더 아프다서서히 모로 눕는 배에서 가장 먼저 불안에 떠는 것은 쥐떼가 아니라 작가들이다환멸과 허무와 도피와 무시와 냉소와 분노가 다 지나간 후이제 뭔가가 다시 시작되었다.


「모르는 사람

강화길, 『괜찮은 사람』, 문학동네, 2016, 257-2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