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가 되는 시간 by 현경

내가 내가 되는 시간

줄리언 반스최세희 역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북스, 2012 -

 

문학평론가 황현경

 

특별한 순서 없이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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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문 뒤의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11)

 

줄리언 반스의 장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예순 살 화자 토니가 기억 속 사십여 년 전 장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그 장면들에는 고등학교 친구 콜린과 앨릭스도 등장하지만역시 주연은 에게 기억 속으로의 초대장이나 다름없는 유언장을 보내온 포드 여사의 딸대학 시절의 연인 베로니카다더불어 이 모든 기억을 관통하는 이고교 시절에 만나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는 와 이별한 베로니카와 사귀었다 돌연 욕조에서 손목을 긋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 에이드리언이 또 하나의 주연이다아직 베로니카와 연인이었던 시절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포드 여사가 세상을 뜨며 오백 파운드의 돈과 함께 보내온 그 유언장에 언급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의 행방을 쫓는 토니의 여정이 그렇게 시작된다.

사라진 일기장을 마침내 찾아내기까지의 이야기가 길게 펼쳐진다는 말은 아니다토니가 보게 되는 것은 일기의 복사본 한 장일 뿐이고문제의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던 베로니카는 정작 그것을 태워버렸다고 토니에게 말한다그러한지라 자연 이 여정은 일기장이 아니라 그것의 주인인 에이드리언에게로 방향을 틀게 된다그 종착지에서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가 아닌 포드 여사와의 사이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얻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이 충격적인 결말은 이야기상에서 반전으로 작동하지만그렇다 한들 그 사실이 에이드리언의 짧은 삶과 이른 죽음에 대해 무언가 더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그가 정말로 누구였는지죽어 없고 남긴 기록도 사라진 그 부재로부터 그의 존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가 여전히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해야만 할 터토니의 기억 속이 바로 그곳이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과거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이제 나는 알고 있다역사는 살아남은 자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101)

 

전체 분량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1부의 주인공은 단연 생전의 에이드리언이며각별하게 떠올려지는 것은 그 천재적인 소년이 역사 수업 시간에 헌트 선생과 나누었던 문답들이다이 대목들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행해지게 마련인 캐릭터 소개이면서동시에 이 소설이 기억과 시간 그리고 역사(history)와 그의 이야기(he’s story)‘에 대한 것이 되리라는 점을 강하게 암시한다. ‘가 역사를 승자들의 거짓말이라 단언하자 선생은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33)고 지적한다에이드리언의 대답은 이렇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34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의 실증주의적 역사관과 (언제나 함께 거론되곤 하는영국의 역사학자 카(Edward Hallet Carr)의 해석주의적 역사관 모두를 회의(懷疑)하던 그의 답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토니는 알지 못했다깨달음은 저 자신이 직접 에이드리언을 회고하는 지금불충분한 문서들에 의존한 채 부정확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의 이야기를 복원하려는 지금에서야 찾아온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윤색하고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165)

 

미리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깨달음이라고는 하나 너무 늦게 찾아왔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차라리 늦었기 때문에 비로소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면 모를까서로의 결속을 다지겠다는 허세를 부리며 콜린앨릭스와 함께 손목시계의 앞면을 손목 안쪽으로 돌려서 차고 다녔던 그 시절에그 우스꽝스러운 짓을 통해 시간을 사적인 것으로심지어는 내밀한 것으로”(16오인했던 그 시절에, ‘시간은 내 편(Time is on my side)’이라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껏 젊음을 탕진하던 그 시절에 가 그걸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사십여 년에 걸친 시간이 더해지고서야 찾아온 이 깨달음에 즈음하여 초점은 가 아니라 줄곧 자신의 인생을 저 자신에게 이야기해왔으되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곱씹어본 적은 없던 긴 시간들을 다 흘려보낸 후에야 뒤늦게 제 삶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 토니 자신에게로 옮겨온다말하자면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찾는 것에서 출발해 마침내 자기 자신을 찾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 결정적인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 베로니카가 보관해온 편지다토니 자신이 사십여 년 전에 쓴축복받아 마땅한 시작하는 연인들을 향해 쏟아낸 무시무시한 저주가 담긴 한 장의 편지벽난로 속에 넣고 태웠다고 제멋대로 기억해온 그 편지가 시간을 넘어 최종 수신인인 저 자신에게 도착하면서 토니는물결치며 상류로 거슬러 오르던 세번강의 밀물처럼시간을 따라 흘러온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금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즈음에 이르러 그간 토니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전처 마거릿은 말한다. “토니이제 당신은 혼자야.”(185그 일은 혼자서 할 수밖에 없다고제 인생을 다시 떠올리고 그리하여 그것을 다시 사는 일은 온전히 토니 자신만의 몫이라고 말해주려던 것이리라자책과 회한과 뒤늦은 상처와 고통을 혼자 다 짊어지는 것만이 제 삶을 제 것으로 살아내는 방법일 테니까그것이 이 긴 여정의 진정한 종착지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이긴 적도패배한 적도 없이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242~243)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분명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소설이다그러나 모르고 한 번 살았던 삶을 토니가 다시 살게 되었으므로 적어도 두 번은 반복된 그 삶은 참으로 길고 길다그 거듭된 삶에도 빈자리는 여전히 있다가령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동침한 이유나 자살을 택한 그가 정말로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토니도 우리도 다 알 수 없다이에 대해서라면 역사 수업에서 토니를 매료시키고 만 에이드리언의 대답 이상은 없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15그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인용하며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29)라 했지만삶이라는 선물을 책임지고 지휘하고 온전히 포착하다 끝내 스스로 놓아주는 권리까지 행사하기도 했지만같은 책에서 카뮈는 삶이 부조리임을 알면서도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삶을 산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뭔가 일어났다그렇게 삶은 계속되었다.”(245뭔가 또 일어날 것이다그렇게 삶은 지금껏 그랬듯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모습 그대로 또 계속될 것이다틀리는 법 없는 그 슬픈 예감을 받아들이는 것그 정도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책임이 있다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혼란이 있다거대한 혼란이.(255)


「내가 내가 되는 시간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2018.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