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인간 by 현경

간신히 인간

정유정28은행나무, 2013 -

 

문학평론가 황현경

 

베링 해가 훅사라졌다백색 어둠이 그 자리를 채웠다바람이 눈발을 휘몰며 불어치고 암벽 같은 빙무가 세상을 가뒀다성미 사나운 북극 마녀화이트아웃이었다재형은 질끈눈을 감아버렸다.(7)

 

작가가 밝힌바 28(은행나무, 2013)의 무대 화양은 火陽’, 곧 불볕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가공의 도시다모든 것이 불타는 곳인수공통전염병으로 눈이 붉게 타오른 이들의 생명이 하나씩 꺼져가는 동안향할 곳 잃고 떠도는 욕망들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다 엉뚱한 곳으로 불길을 옮긴다말하자면 이것은 원인 불명의 재앙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삶이 불쑥 솟아오른 저마다의 어두운 마음들에 의해 갉아 먹히는 이야기를 담은 아포칼립스 소설이다본디 모든 소설은 무엇이 인간인가를 어떤 식으로든 묻게 마련이지만이런 유의 소설에서 그 질문은 특히 첨예하다소중하게 지켜왔던 온갖 가치들이 순식간에 사치가 되어버리는 순간에 우리는 얼마나 인간일 수 있는가생과 사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속수무책의 재난에 임하여 하나씩 잃고 버린 후에도 남는 무언가우리를 도저히 인간이 아니지 못 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첫머리에 펼쳐진 재형의 과거화양이 빨간 눈을 가진 이들의 도시가 되기 시작한 2013년 1월 현재로부터 십일 년 전 알래스카의 설원그때 그곳에 답이 있다세계 최대의 개썰매 경주 아이디타로드에 개썰매팀 쉬차를 몰고 참가한 재형은 화이트아웃 속에서 몰려든 굶주린 늑대들에게 열여섯 마리의 썰매견들을 먹이로 던져주고서 목숨을 부지한다우리로서는 그래봐야 개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쉽지 않으나 재형에게만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그 순간 교환된 것은 열여섯 마리 개와 제 목숨 하나 이전에 생명과 생명이기 때문이다그러한지라 그가 화양의 백운산 기슭에서 유기동물보호소이자 동물병원인 드림랜드를 운영하며 개들의 생명을 구해온 것은 속죄이기도 할 터이다물론생은 그리 간단치 않기에 그 순간 재형에게 각인된 진실은 한층 더 복잡한 것이다.

 

그때 살려고 애쓰는 것 말고 무엇이 가능했겠느냐고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본성이었다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자신을타인을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345~346)

 

삶의 폭력성과 슬픔을 초과하는 무언가그 무언가를 살아갈 이유로 지니고 있는 동안만 우리는 인간이다모두 여섯 개의 시점(視點)으로 나뉜 이야기들이 모여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인간이라 불릴 자격을 지닌 이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무언가가 있다수없이 많은 이들이 회생의 기약도 없이 쓰러져가는 중에도 119 구조대원으로서의 임무를 멈추지 않는 기준도제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격무 속에서도 간호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수진도마치 풍랑은 풍랑에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193)라던 수진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 그들은 기어이 그 지옥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고 만다더욱이 생판 모르는 이들을 거두느라 제 가족을 잃기까지 하는데도 그러하다는 것은 곧 그들이 감히 생명의 경중을 저울질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묘지 여기저기를 랜턴으로 살피고 있었는데 뭘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집중해서 살필 만한 뭔가가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정신없이 봐요?”

재형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봤다.

이야기.”

()

그녀는 비로소 눈 위에 뿌려진 작은 핏자국들을 볼 수 있었다좀 전까지만 해도 새하얀 눈길로만 보였는데시력의 문제는 아니었다시선의 차이였다그것은 한 인간이 속한 세계의 차이와도 같았다.(236)

 

그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재형을 개장수로 모는 기사를 써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던 윤주의 변화가 선명하게 눈에 띈다외부인으로서 화양에 고립된 그녀는 애초에 재형이라는 한 인간의 삶나아가 화양 시민들의 죄 없는 죽음을 그저 기사를 위한 사건으로만 취급하던 이였다그랬던 그녀가 재형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의 인도(引導)를 따라 꺼져가는 생명들의 살려달라는 울음을 듣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사건이 아닌 수많은 개별적 생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른다그 과정은 재형이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져가며 십일 년 전 과오를 현재에서 마침내 바로잡게 되는 과정과 함께 28의 이야기를 지탱한다그렇다면 그 둘이 끝내 서로를 향해 손을 뻗게 되는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그것은 차라리 그 지옥불조차 미처 다 태우지 못한 희나리 같은 이들 모두가 가슴에 품고 있던 무언가이므로.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윤주에게 그곳은 재형이었다그에게로 가고 싶었다그가 그리웠다.(404)

 

28에는 동해와 같은 악인도 등장한다또 하나의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는 맹견 링고가 자신을 해한 이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재형의 애견 스타를 향한 연모만은 소중히 간직했던 반면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말미암아 내면이 온통 악()으로만 가득 차게 된 동해는 도무지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동물에게도 한 생명으로서의 지위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이 소설에서인간과 동물 모두를 사물인 양 대하며 아무 죄책감 없이 파괴하는 동해만은 모든 인물의 가장 반대편에 서 있다인간이려 애쓰는 이들이 간신히 인간으로 머무는 동안인간이길 간단히 포기한 그는 이토록 쉽게 인간이 아니다그가 없었더라면 28은 어쩌면 휴머니즘 소설일 수도 있었겠지만그의 존재로 인하여 이것은 결국 (전염병 자체는 리얼한 설정이 아닐지라도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돌고 돌아 다시 이 질문이다우리는혹은 당신은 어느 쪽인가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김명남 옮김창비, 2015) 등을 통해 우리에게는 주로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정해영 옮김펜타그램, 2012)를 참고하자면 우리는 최악의 순간에도최악의 순간에야말로 끈질기게 인간이다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대형 재난을 연구한 그 책은 우리가 재난이라는 지옥을 관통해 연대와 이타주의와 즉흥성이 살아 숨 쉬는 낙원에 도달한다고 결론 내린다모든 것은 빛난다(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김동규 옮김사월의 책, 2013) 식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러한 어둠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을 눈부시게 내뿜는 순간일 것이다그래서당신은 정말로 어떤가진심을 다해 우리라 답해줄 당신이길 바란다당신도 나도 아직은 여기 이 세상에 함께 머무는 중이므로.

 

서재형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479)


「간신히 인간 - 정유정, 『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2018.10.08.